아니에르노 저서 여자아이 기억에 대한 독후감.
★★★★☆
얼마 전 '단순한 열정'을 읽었을 때도 느꼈는데, 아니 에르노의 작품은 내가 쓴 일기장을 다시 읽어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런 느낌은 그의 작품을 자꾸 읽고 싶게 만드는 동시에 나 혼자만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고유성을 깨뜨리고, 사실 그것은 내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그저 인간이면 겪는, 어떤 보편적이고도 흔한 것이었다는 충격을 안겨 준다.
'여자아이 기억', Memoire de fille는 아니 에르노가 1958년과 1960사이 겪었던, 자신의 삶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던 그런 사건들에 대해 적은 글이다. 독특한 점은 일반적인 회고록이나 자서전과는 다르게 그가 과거의 자신을 마치 타자를 바라보듯이 적어 나갔다는 점인데 이것 또한 내가 일기를 쓸 때마다 느꼈던 부분이라 친숙하면서도 생소했다.
과거의 자신은 자신이면서 자신이 아니다.
나 자신은 이 순간만 존재할 뿐, 지나간 과거 속 자신은 현재의 나와 동일한 인물이기 보다는 기억으로 묘사되는 사람에 가깝다. 과거의 나는 나이면서 내가 아니다. 또한 기억은 회상할수록 왜곡되는데 종래에는 현실보다 뚜렷한 현실감을 드러내기도 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현실성과 병치했을때 오히려 실제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은 비현실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아니 에르노의 이런 시각은 '여자아이 기억' 곳곳에서 드러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무엇을 느꼈느냐, 하면, 글쎄 무엇보다 현실적인 성교육의 중요성을 느꼈달까. 18살의 아니 에르노처럼, 수많은 여자아이들이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 모르는 채 폭력적인 상황에 노출되어 있다. 사회에 뒤떨어진 제도는 이런 아이들을 보호하는 데 턱없이 부족하며, 사실 보호할 의지를 보이고 있는지조차 의문스럽다. 사회가 이들을 보호해주지 못한다면 최소한 제대로 된 교육을 통해 그들 앞에 어떤 종류의 삶이 놓여 있는지 자각이라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급선무 아닐까.
타인이 겪은 일을 적는 것 마냥 당사자성을 배제한 채 담담히 서술해내는 필체 때문에 오히려 아니 D가 견뎌낸 삶이 참담한 서글픔으로 다가온다. 어쨌든 우리들 대부분은 언젠가 부모님의 안락한 울타리를 떠나 홀로 서야한다. 홀로 서서, 홀로 집단을 마주하고 그 집단 속에서 살아 남을 방법을 필사적으로 배우고 강구해 나간다. 그러다 보면, 그렇게 힘들이지 않아도 집단이라는 거대한 매커니즘 속에 부품으로써 (나름) 순조롭게 굴러가는 순간이 오지만, 누구나 융화되는 그 처음은 저마다 고통스럽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과정이, 종종 순수한 영혼들에게는 너무나도 날것의 잔혹함을 드러낸다는 점이 참 서글프다 하겠다.
마지막으로, 아니 D의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여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제는 말하기도 지치고 지겨운 불균형한 운동장. 많은 이들과 잔 남자는 승리자가 되고, 많은 이들과 잔 여자는 창녀가 되는 현실. 여성에 대한 유린, 조롱. 철저히 여성을 타자화한 사회에서 자라 스스로를 상품화 하면서도 수치심을 모르는 삶. 이 모든 것이 책에 담겨있다. 50년 전 프랑스 사회와 현재 한국 사회에서 놀라우리만치 많은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천천히 나아지는 삶.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인간. 여성. 그래 그것이다. 이것은 여성에 대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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